안양YWCA
 
 
 
 
 
작성일 : 12-04-02 00:27
3월 공동기도회 설교문 "나는 내평화를 너희에게준다(요14:27, 사53:5)"
 글쓴이 : 안양YWCA
조회 : 2,507  
 
제목 :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본문: 요14:27 , 사 53:5 /  설교 : 김명희 목사


 “ 돌봄으로 정의“에 이어 ”나눔으로 평화“라는 주제아래 올 해 우리와이의 방향을 정하고  평화를 위하여 나눔의 삶을 실천해 내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같이 묵상하며 지내야할 사순절기에 오늘 9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와이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과  같은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요한14:27에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이 말씀속에서  나눔으로 평화라는 우리의 목표가 예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평화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사야서에서 예언되어진 예수님에 대한 증언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나눔의 삶에 동참함으로 순례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1.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본문의  peace 는 헬라어로 “에이레넨”입니다.   전쟁과 대립적인 개념,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기인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의미하며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솰롬’으로 번역하여 전쟁에 반대되는 상태라기 보다 불안이나 갈등이 없는 완전한 정의가 실현된 상태, 단순히 전쟁과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조금도 부족함 없는 완벽한 행복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평화는 여호와에게서만 나올 수 있으며 그 분만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에 두고 기드온이 자기가 여호와를 위해  단의 이름을 ‘여호와 솰롬)이라 했는데 ’ 주의 평화‘란 뜻으로  악이 득세하는 상황 가운데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약속하신 이 평화도  어떠한 분쟁이나 문제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절대 평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께서도 많은 분쟁에 휩싸이셨고, 심각한 문제들을 만나셨지만  어떤 분쟁이나 문제들도 예수님의 길을 막지 못했으며,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들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닥친 문제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평화이며,
최악의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굳건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옥중에 있던 베드로나 바울사도가 보여준 태도에서 우리는 이 평화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평화를 소유한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히11:38)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평화,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평화가 바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에이레네’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평화를 얻는 방법 그것은 예수 안에 거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자신을 떠나서는 결코 평화를 얻게 되지 못한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에게서 나므로 (요한14:27)  예수를 떠나서는 누구라도 진정한 평화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이 평화가 있는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며,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라도, 주께서 명하신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평화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 고통이 있어야지만, 그 십자가가 있어야만 올 수 있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의 댓가로 오는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고통 없이 오는 것이겠지만, 예수님이 주는 평화는 고통을 수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할 수 없고  자발적으로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십자가의 결과로 나와진 평화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해낼 수밖에 없는 십자가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기쁨을 남겨주는 십자가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이사야 53:5에서 예수님의 삶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찔리고 상했으며 징계를 받기도 하고 채찍에 맞으면서도  이 땅위의 평화를 위하여
스스로 감내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 불리워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택한 과정적 사건이었음을 주석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정체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회 주변부의 삶을 사셨습니다.  탄생에서부터 성장하실 때까지, 사역의 과정부터 죽음에 이르시기 까지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역경을 뛰어넘는 고난의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노예의 신분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근원으로 볼 때 희브리, 이브리, 아삐루라 불리웠는데  이는 노예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비추어보면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로서 사회적 법적인 보호망아래 있지 아니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난한 사람들로서  본디 사회적 약자의  모습입니다.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이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 인생의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잘 아는 자라고 (사53:3) 증언합니다.  슬픔의 사람이요 질병을 잘 아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슬픔과 고통 아픔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다 아십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높은 자는 낮은 자들이 얼마나 소외받고 불공평한 처사를 당하는지 그 형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난한 자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처지를 절대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이 되어 인생들의 질고와 간고를 친히 경험하시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인생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으로  우리는 불림을 받았습니다.

3.  우리 시대의 십자가 그것은 나눔의 실체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있는 그 자리에  거기에 나눔의 실체가 있습니다
거기에 나눔의 모습이 자리합니다. 거기가 나눔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나눔의 모습입니다.

첫째로  나눔은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견디는 것입   니다.
저는 지역아동센터를 26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동들을 돌보는 일인데. 우리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중에
“ 네가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멘스” 라는 유행어처럼  같은 행동과 행위를 하더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모습들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가난한 부모의 삶의 문화로 인하여 학교에 늦을 때가 종종있습니다.   학교에 늦게 오면 “ 너는 왜 그러니.  또 늦잠 잤구나.  아님 오늘 또 늦었니?” 아이를 향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너는 문제 많은 아이구나”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여유있는 부모와 좋은 환경에서 아래서 자라난 아이일 경우 “어쩌다 늦었니?  집에 무슨 일이 있었니.  그럴 수 있겠다.  늦어서 마음이 불안했겠네 ” 라며 아이의 입장을 지지하는 언어를 아이에게 투사합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모가 부재한다는 이유로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편견속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가정환경에 따라 아이들의 삶이  규정되어져 버린 상황이 오늘날 “학교폭력”이라는 뿌리깊은 문제를 양산하게 된 것을 확인합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이해와 기다림으로  고통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둘째로  나눔은  스스로 할때까지  양보와 기다림으로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 (개역한글) 요5:5~8말씀입니다.

이 병자는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 라며 예수님께 말합니다 . 이에
예수님께서는  병을 낫게 해 주시기 전에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하여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먼저 내려가는 사람들의 양보가 아쉬운 시절입니다.
경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는 사람들. 
자신스스로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사람들.
이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
이들이 달려가서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주위에는 삼십팔년된 이 병자처럼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줄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찾고 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양보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눔의 방법과 우리 와이의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으로서의 고백과 결단에 있습니다.

다원화, 다양화, 다민족화, 다문화사회의 문제, 이시대의 아픔이라 할 수 있는 문제로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에 들어왔지만 문화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힘들어하는
이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서로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도록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우리들의 인내와 기다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동질감이 요구됩니다.

셋째로  나눔은 상생입니다 , 함께 사는 것입니다.

“제가 배가 굉장히 고픕니다.
배가 고픈 저에게 자원봉사선생님이 다가와  맛있는 라면을 끊여다 주었습니다.
저는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는 저를 보고 그분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분은 그날 처음 봉사를 나왔고, 그리고 당신이 직접 시간을 들여 끊인 그 음식을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는 저를 보니  나누는 기쁨이 이런 것이구나  뿌듯해 했고, 돌아가 부모와 친구에게, 이웃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밤 저는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속이 너무 아팠으니까요. 사실 저는 위장병이 생겨서 라면을 먹으면 곤란했거든요.
저에게 필요한 것은 죽이든, 밥이든 먹어야 했지만 봉사하고자 하는 그분의 정성을 생각해서
안 먹을 수 없었고, 후원을 받는 입장에서 이것달라 저것달라 요구할 입장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봉사라는 행위에 행복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아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봉사, 나눔, 우리의 선한 행위들은  쌍방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생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는 길입니다.“
일방적인 것은 때로 또 다른 아픔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고통에 대해  사실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어디가 아픈지 알지 못한다면 그 치유는 공허할 수밖에 없고 아픔을 치유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기부와 봉사와 구제로 행위 지워지는 나눔은 보편적으로 내가 나의 가진 것을 나누고,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을 의미하게 되지만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일방적인 것이 아닌 그 대상이 주체가 되어 그 사람의 삶을 내가 함께 살아내는 것, 곧 상대의 삶과 나의 삶을 함께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그 사람의 삶에 함께 동참한다하는 뜻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있음으로 살릴 수 있는 세상,  대상화된 개념이 아닌  나, 너에게 서로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상생입니다. 나눔은 서로 사는 것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살아야 합니다.

4.   평화를 위한 행진

고통을 감내하고 나서 오는 그 기쁨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실체입니다
고통이 오더라도 기꺼이 해내는 해내고자 하는 의지 거기에 나눔의 정신이 있습니다.
     
     “이웃이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이웃이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이웃이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이웃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도다“

      “내가 찔림으로  그들의 허물이 벗어질 것이요
       내가 상함으로  그들의 죄악이 없어질 것이요
       내가 징계를 받음으로  그들은  평화를 누릴 것이요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그들은 나음을 입을 것이라“ 
      
이와 같은 고백이 사순절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에게 평화를 위한 행진은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로서의 존재감을 갖는 우리 Y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개입,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개입,
노예와 같은 생활 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개입,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나눔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나눔의 실체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나눔의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그 고백이 곧 나눔의 실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했던 예수님의 평화가,  평화를 위하여 나아가는 우리 와이의 나눔의 순례의 여정위에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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